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5.18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 “광주 사람이니 잘 아시겠죠.”라는 말이 붙는다. 그럴 때면 나는 “그 때 저 죽을 뻔 했어요.”라고 농담처럼 답하곤 했다.

당시에도 나는 무등산 자락에서 살았다. 광주 시내가 봉쇄되는 바람에 우리는 우리대로 고립된 처지였다. 18개월 된 아기였던 나는 홍역에 걸렸고, 시내에 있는 병원에 가지 못해 죽을 고비를 겪었다, 고 한다. 물론,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때 나 초등학교에 입학했잖아.” 언니는 여덟 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니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어쩌면 특별할 것도 없는 기억이 푹, 하고 나를 찔렀다.

그 때 국민학생이었던 언니·오빠들은 지금 초등학생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일단은 학교에 안 가서 좋았지.”

“탱크가 지나가도 아스팔트가 안 깨지더라.”

“석가탄신일인데 만화영화를 안 했다니까.”
 
신기하게도 그 때 이야기를 하면 저절로 아이의 얼굴이 되었다. 별 거 아닌 기억들이 옹기종기 모여, 별 거 아닐 수 없는 무언가로 영글어가는 동안, 나는 기묘한 통증에 뒤척였다.

아이들의 기억은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그들은 읽거나 들은 게 아니라 직접 보고 겪었다. 또한 아이들은 현장에 있었지만, 누구도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들이 살았던 동네를 걸었다. 집들도 나이를 먹는다. 가만 보면 벽의 흔적과 기억의 속성은 닮은 데가 있다. 켜켜이 쌓이고 닳고 굴절되지만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기묘한 통증을 벗 삼아 오롯이 한 해를 걸었다. 우연한 벽의 흔적이 무연한 아이들의 기억과 뒤엉켰다. 묻고, 묻지 않은 이야기들이 무게와 의미의 뒤꼍에서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