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다

<묻다> 작가노트

볕 좋은 봄날 오후였다. 예술 평론 세미나에 갔다가 3년 전에 구제역과 조류 독감으로 인해 조성되었던 매몰지가 법적으로 사용 가능한 땅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특별히 나에게 한 말도 아니었는데, 웬일인지 그 말이 또렷하게 내 귀에 박혔다.

2010년 겨울이었다. 매일 산채로 파묻히는 동물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었다. 트럭에 가득 실려 온 돼지들이 구덩이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돼지는 공중에서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수천마리의 오리가 뒤뚱뒤뚱 쫓기다가 구덩이 속으로 후드득 굴러 떨어졌다. 영문을 모른 채 두리번대던 동물들 위로 흙더미가 쏟아졌다. 살처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그제야 알았다. 충격, 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생명을 저렇게 대해도 되는 걸까?’ 너무나 모질고 잔혹한 현실에 내 안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가 훼손되는 기분이었다.

매몰은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수많은 목숨이 산채로 파묻혔다. 정부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엄숙히 선언했다. 많은 이들이 동원되었다. 살아 있는 생명을 구덩이로 밀어 넣는 일은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을 할퀴었다. 생명을 삼킨 땅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썩다 만 사체들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2014년, 이렇다할 뉴스 없이 법정 발굴 금지 기간이 해제되었다. 3년 전, 천만 이상의 생명을 삼킨 4,799곳의 불온한 땅은 고스란히 사용가능한 땅이 되었다. 정말 사용가능한 땅이 되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매몰지를 찾아갔다. 비닐하우스였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좀 살펴보려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물컹, 하고 땅이 꿀렁거렸다.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발길 닿는 곳마다 물컹거리며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그것은 눈이나 진흙을 밟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설상가상 갈라진 땅 사이로 솜뭉치 같은 곰팡이가 피어올랐다. 저 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법정발굴금지 기간이 해제된 매몰지 중 100여 곳을 살폈다. 대개의 매몰지는 비닐로 은폐된 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곳곳에서 사체 썩는 악취가 피어올랐다. 대지의 기척도 예사롭지 않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린 대지는 검게 변했다. 갈라진 틈 사이로 곰팡이를 뿜어내기도 했다. 겨우 싹을 틔운 풀들이 액체를 토하며 기이하게 죽어갔다. 근면한 농부들은 농사를 시도했다. 콩은 자라지 못했고 부추는 생육이 더뎠다. 논에는 날벌레가 자욱하게 끼었고, 옥수수와 깨는 짓무르고 쓰러졌다. 그것은 이제껏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장면들이었다. 

전염병은 해마다 반복된다. 정부는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따라 예외 없이 파묻는다. 그곳에 죽음은 없다. 상품이 폐기될 뿐이다. 판단이 거세되고 효율만이 작동하는 동안 동물들은 면역을 키울 기회를 놓치고, 대지는 자정능력을 상실해간다.

몸을 낮추고 대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 동물들이 물컹한 촉감으로 나를 뒤흔들었다. 통째로 썩고 있는 땅과, 기이하게 주어가는 풀들, 살해에 사용된 비닐들은 썩지 않고 남아 우리가 저지른 일들을 묵묵히 증언했다. 

이 작업은 합리성과 경제성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우리 사회 시스템에 의해 산 채로 매장된 동물들과 함께 우리들의 인간성마저 묻혀버린 땅에 대한 기록이다.

동물들과 함께 인간성을 삼킨 
대지의 구토

불안과 불감 위에서 펼쳐지는 
근면한 작물재배

자본의 굿판
죽음 없는 무덤들

시간을 되돌려도
그들의 종착지는 도축장

애초에 잉태는 없었다.
생산되고 소비되고 폐기된다.

태어난다는 것은 축복일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나을까?

물음이 절뚝이며 되돌아온다.
그들과 우리의 경계가 흐려진다.

세상에 대한 환멸, 
존재에 대한 연민.

아름답고 징그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