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길 위에서 사슴을 만났다.
누군가 노루였어? 아니면 고라니? 라고 물었을 때 나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이름만 익숙할 뿐 서로 어떻게 다른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나는 고라니나 노루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그들을 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름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신비를 하나의 단어로 덮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난 10년간 200여 마리의 고라니를 만났다.
처음 고라니 초상사진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길어도 3~4년이면 이 프로젝트를 매듭지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50여 점의 초상사진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운 좋게 기회를 얻어도 야생의 존재를 정면에서 마주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경우에 따라 며칠이 걸리기도 했고,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첫 만남에 극도의 경계심이나 불안감을 표현해 시도조차 못 한 경우도 많았고,
몇 달을 기다렸으나 마음을 열어주지 않아 끝내 촬영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미처 준비되기 전에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어린 고라니들의 초상은 졸업앨범 형식으로 구성했다.
무미건조하고 획일적인 타원형의 틀이 역으로 그들의 고유성을 도드라지게 하는 장치가 되어주었다.
정성을 들여 초상사진을 하나씩 완성해 나갔다.
비슷하지만 똑같은 얼굴은 없다.
모두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존재로 초대받은 생명들이다.
그 유일무이함에 가슴이 부풀기도, 아리기도 했다.
초상사진 작업을 하는 동안 고라니는 나에게 북극곰이나 앨버트로스 같은 이국의 생명들보다 애틋한 존재가 되었다.
고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송곳니와 무언가 한없는 것을 바라보는 듯 애수에 젖은 눈빛, 복숭앗빛 혀를 살짝 내밀며 ‘메롱’하는 버릇,
어디서 작은 기척이라도 들리면 흠칫 놀라 한쪽 발을 든 채로 얼어붙곤 하던 겁 많은 성격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끝끝내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던, 그래서 한 장의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던 고라니들조차 내 마음속에 들어와 별처럼 총총히 빛나고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흔한 사슴이겠지만, 모든 존재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가지고 있다.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는 일, 그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의미와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약간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들을 천천히 들여다볼 시간.
※ 고라니는 우리 ‘고유종’이자, ‘희귀동물’이며 치타, 코알라와 같은 등급의 ‘멸종위기 종’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농작물 피해를 근거로 ‘유해 동물’로 지정하고, 해마다 수십만 마리를 사냥하고 있다.